꽃밭
서덕준
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더니
너 때문에 내마음엔 이미 발 디딜 틈 없는
너만의 꽃밭이 생겼더구나.
산산조각
정호승
룸비니에서 사온
흙으로 만든 부처님이
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
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
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
산산조각이 나
얼른 허리를 굽히고
무릎을 꿇고
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
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
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
불쌍한 내 머리를
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
부처님이 말씀하셨다
산산조각이 나면
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
산산조각이 나면
산산조각으로 살아 갈 수 있지
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
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
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
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
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
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봅니다
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 넣다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
조미료를 더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많이 넣으면 느끼해서 못 쓴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 넘칩니다
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
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
저는 휴지로 입을 닦다말고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, 좋아한다, 사랑한다, 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
봄날에는 '사람의 눈빛이 제철'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
낙서, 박준 |
슬픔이 기쁨에게
정호승
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
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
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
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
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
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
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
가마니에 덮힌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
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
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
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
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
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
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
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
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
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
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
"책 읽어주는 여자"에서 퍼 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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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자가 웃자
남자는 다행이다 라는 듯 웃으며 일어섰다.
나와 보니 어느새 어둠.
달은 노랗고 예뻤다.
여자는 달을 보며 말했다.
"오래전 일본 소설가 하나가 쑥스러웠던지
'I love you'를 '오늘 달이 참 밝네요'라고 번역했데요"
남자는 귀엽다며 웃더니
"오늘 참 닭이 밝네"라고 말했다.
여자가 대답했다.
"그러게요, 오늘 달이 참 밝네요."
- 정현주, 다시사랑 중에서-
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/ 성철스님
몸에게 물어 보기를...
무슨 영양분이 더 좋은지가 아니라
세상의 그 누군가를 위해
내 몸은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...
머리에게 물어 보기를...
배기량, 아파트 평수, 은행의 잔고가 아니라
사랑이나 우정이란 단어를
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를...
가슴에게 물어 보기를...
금싸라기와 돈을
얼마나 품고 살아가는지가 아니라
어떤 감동이 그 안에 깃들어 있는지를...
진지하게 물어 보기를...
지금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은
뺏고 뺏기는, 피 튀기는 전쟁터인지 아니면
아름다운 꽃동네로 봄소풍 나온 것인지를...
책
그 사람 때문에 책장에 묵혀 놓았던 책을 꺼냈다.
그 책의 구절 구절이 좋아
종이 한장도 구기지 못 했던 그 책
지난 세월만큼 닳고
그 사람과의 거리만큼 바래버린 책을
다시 읽기 시작했다
누군가에게 닿았어야 하는 밑줄 친 문장들
책이 헐고 종이는 바랬을지라도
그 절절한 글이 어디 갔으랴
그 시절이 잊고 싶지 않아 끼워 놓은 책갈피
책갈피가 끼워진 그 자리에서
나도 다시 살아보고 싶다.
별국 / 공광규
가난한 어머니는
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
학교에서 돌아온 나를
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
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
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
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
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
배가 불렀다
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
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
어머니의 눈에서
별빛 사리가 쏟아졌다.
당신은, 나에게 해바라기를 건네준 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. 기차 창 밖으로 해바라기 밭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내 손을 잡아 끌며 “여기서 내리자!”라고 소리쳤던 것을. 기쁨이 손까지 전달되어 기차표를 해바라기 밭에 내던져버렸던 것도.
이제 그 기억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 때가 되었다 해도 난 그 기억만으로 가끔 힘이 난다. 나는 이 세계가 당신과 나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으며 적어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으니.
기차역을 등지고 해바라기 숲으로 내달을 때 당신 몸을 빠져나온 웃음 소리.
어쩌면 그토록 진할 수 있었는지 하마터면 떨썩 주저앉고 싶었다고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. 그때, 우리 흥취만으로도 해바라기 숲을 갈아엎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진 않았던가. 두 인간에게 찾아온 광란의 상당 부분을 다 쓰고 난 뒤 어지러워했던 그날 이후, 그 언제에도 그토록 노란색을 사무치게 부볐던 적이 있었던가. 고마운 것이다. 그 시간에 같이 있을 수 있었느니. 다 끌어안고도 이토록 남는 것들이 있으니.
노란색 포스트잇에 ‘밥 꼭 챙겨 먹어요’라든가 ‘내일 오후에 잠깐 들를께요’라고 써서 냉장고에 붙였던 글자들을 어느 날 하루아침에 ‘이제 그만 할래요’라고 바꾸고 잠적해버린들 그것이 그만 둘 수 있는, 버릴 수 있는 마음이던가. 그만두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,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. 사랑이어서 일어난 그 많은 일들을 단번에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.
- "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" 중, 이병률 여행산문집
어느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
유하
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
그대가 오리라
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
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
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
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
그러면 그 밀알로,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
그대 손길 닿는 곳엔
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
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
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
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몸인 땅에서
다만 별빛에 배부르리
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
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
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
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
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
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
꽃가루를 탐하리
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뿐
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
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
나 그대를 맞으리라
