낙서 - 박준

2016. 1. 2. 05:13

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 

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

 

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 

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

 

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 

저는 밥집을 찾다 

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

 

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

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

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

 

메뉴를 한참 보다가 

김치찌개를 시킵니다

 

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

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봅니다

 

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 넣다말고 

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

 

조미료를 더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 

많이 넣으면 느끼해서 못 쓴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 넘칩니다

 

몇 번을 더 버티다 

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 

조미료 통을 닫았고요

 

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 

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 

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

 

저는 휴지로 입을 닦다말고는 

아이들이 보고 싶다, 좋아한다, 사랑한다, 

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

 

봄날에는

'사람의 눈빛이 제철'이라고 

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

 

 

낙서, 박준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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